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클랜드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external/www.britishnavalhistory.com/Hermes-21st-July-1982-portsmouth.jpg]] ▲ 1982년 7월 21일 영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와 함께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 3개월간의 단기전이었지만 이는 영국의 건재함을 알린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의 전사자는 영국 측에서 255명, 아르헨티나 측에서 649명이 발생했다. 이후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의 수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말도 있지만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 [[http://www.theguardian.com/uk/defence-and-security-blog/2013/may/14/falklands-veterans-suicide-army|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이다. 그 외에도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당한 민간인 선원 16명이 사망했다. 불만 여론을 무마하려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 후에도 승전했다고 거짓말까지 했지만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게 패전이 들통났다.[* 이 때의 아르헨티나 대표팀도 어찌보면 포클랜드 전쟁의 피해자였는데, 갈티에리의 거짓선동에 속아넘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패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멘붕|멘탈이 터져버려]]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호텔 방문을 걸어잠그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2라운드 12강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와 브라질에게 모두 패하여 12강 11등으로 탈락하여 12강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씁쓸한 결과를 맞이하였다.] 이에 전국민적인 분노가 솟아오르자 갈티에리는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그노네 역시 이듬해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했다.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국가수반부는 완전히 개판이 되었는데 '''2년 동안 대통령이 4명[*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알프레도 오스카르 생장(권한대행), 레이날도 비그노네]씩이나 바뀔''' 정도로, 그러니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작자들이 임기를 고작 1년조차 못 채우는 지경'''까지 갈 정도로 정치가 망가졌다. 이로써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인륜적인 전횡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는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포클랜드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비유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불성설. 포클랜드 전쟁은 겨우 3개월간 벌어진 단기전이며, 영국군 전사자가 255명, 부상자도 775명에 불과해 미군 전사자만 5만명 단위로 나온 베트남전과 피해 규모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민주당 행정부를 끝장낸 베트남전과 달리 포클랜드의 명백한 승리는 [[보수당(영국)|보수당]] 정권을 연장시켰다. 무엇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손해만 본 베트남 전쟁과 달리 포클랜드 전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이 반드시 군사적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오히려 나서지 않으면 차례차례 영토가 넘어갈 판국이었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전쟁으로 인식되었던 데다가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며 승전한 전쟁이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쟁 이전 70년대 영국 경제는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영국병]]으로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이 악화되어 연간 2.8%의 저성장을 기록하며 1인당 GDP가 세계 18위까지 떨어졌었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즉 양극화 심화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어도, 영국 경제는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6년보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에 훨씬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말 그대로 파탄났던 영국의 농업은 1980년대 이후로는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만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를 생산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마가렛 대처]]가 승전에 힘입어 재집권한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82년 영국의 실업률은 10%에 실업자 수는 300만명에 달했으며, 특히 영국 북부에선 5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비록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의 실정이 누적된 결과였지만 경제파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모조리 현직 총리인 대처에게 쏠렸다. 집권 3년차 타임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처는 '''[[네빌 체임벌린|체임벌린]]과[* 히틀러를 막는 데 실패하여 2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고 평가되었으며 [[보수당(영국)|보수당]] 내각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무는 등 당시 영국 정권은 매우 위태로웠다. 바로 그 때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한 대처는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처 내각의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들은 영국 경제의 회복에 공헌했다. 다른 나라들도 대처의 경제 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지나친 [[민영화]] 남발로 책임은 회피하고 권력만 휘두르려는 정치인으로 낙인찍혔던 대처는 이 전쟁의 승리로 '''최고 지지율 98%'''라는 맹위를 떨치면서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영국 내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대처가 사망했을 때에는 대처에 대한 [[고인드립]]이 영국 전국적으로 대유행했는데, 대처의 정책이 남긴 유산이 대처의 퇴진 이후에도 영국 서민들을 괴롭힌 데다가 대처의 사망 시기도 후술하는 [[대침체]]의 여파가 영국을 덮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전보다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대침체]]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양립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